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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글 : 윤성아 세바시 작가, 콘텐츠 큐레이터]


지금은 세바시를 꺼내 먹을 때 4 새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양력으로 첫 날을 지나 음력 설날로 달려가는 이 시기를 사랑합니다. 분명 새 노트도 사고 결연한 마음으로 새해 계획도 세워보지만 어느 새 지난 해가 다시 돌아오는 듯 합니다. 못된 습관이 고개를 들고 자책이 늘어갑니다. 어느새 새해를 시작한 설렘과 흥분이 가라앉고 심연에 다시 가라앉는 시기가 온 것일까요?  


오래 전 대학입시를 마치고 난 때가 떠오릅니다. 수험생의 딱지가 떨어지자 부모님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방치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마냥 놀아도 되는데 1월 눈길을 헤치며 도움도 되지 않는 영어수업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합격 했는데도 허전함이 덮쳐왔습니다. 그때 읽은 소설이 있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그린 소설 개선문 속에는 퇴각하면서 눈을 치우다 끝없이 시체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제 마음풍경에 딱 어울리는 소설이었습니다. 마침 생일도 1월에 있건만 기다려지기는커녕 더 깊은 우울의 우물에 빠져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설날이 오기 전의 요즘은 우물쭈물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작심삼일 새해계획은 무너진지 오래고, 그렇다면 3일마다 계획을 세우라는 말도 허망하게 들립니다. 이러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받아들 것만 같아 불안감이 스멀거립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직업적 특성상 책에 둘러 싸여 삽니다. 그러다보니 서점은 제게 유혹과 싸우는 공간입니다. 갈때 마다 사고 싶지만 내려놓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질 수 밖에 없는 책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일렁대는 마음을 숨기며 서점에 서서 읽다 주저없이 산 책이 있습니다. 희망찬 새해와는 어울리지 않는 책, 죽음 앞둔 이의 마지막 메모들을 모은 책입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는 생전에 열정적으로 강의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번역서 외에 자신의 철학이 담긴 책을 남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저자는 이 땅 소풍을 끝내고 돌아갔지만 글은 죽지않고 살아 남아 남겨진 이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철학자의 마지막 메모들은 어떻게 다를까, 저의 호기심은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철학적인 사유도 깊은데, 삶에 대한 찬가와 사랑에 대한 의지가 마음을 울립니다. 

“긴 아침 산책. 

 한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 


“살아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하는 저자이기에 평범한 일상은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가족을 출근시키는 매일의 반복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 피아노 소리에  사랑의 마음으로 답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듯 합니다. 두려움과 싸우며 마음이라는 연못에 떠오르는 언어들을 건져 올립니다. 일상의 풍경들을 조각칼로 새기듯  써내려 갑니다. 마지막까지 사명으로 여긴 것은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들은 사랑의 역학을 가르친다. 물들의 사랑은 급하고 거침없고 뚫고 나간다.”

“모든 것은 열려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병들었어도 나는 사랑의 주체다.”

새해 결심이란 진정한 의미의 ‘자기 사랑’이다

철학자 강남순은 한 칼럼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새해 결심이란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자기 사랑’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 사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사랑하고, 이 세계를 사랑하기에 비로소 품을 수 있는 것이 새해 결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 많은 이야기 속에서 '신의 형벌'로 그려지는 이유도 그러하겠지요. 죽음의 기미를 통해 우리는 마냥 흘려보내던  시간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죽기 전에 우리는 가상의 죽음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후의 삶은 부활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유한함을 깨닫게 해주는 이런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흔한 새해결심은 때로 우리를 시험지를 받은 수험생으로 전락시키곤 합니다. 불가능한 계획을 세워 좌절감을 맛보게 합니다. 그 좌절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서 그 이후가 달라질 것입니다. 더 온전히 누리기 위한 기회가 주어졌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요? 새해 계획은 누군가의 계획보다는 자신의 저 깊은 곳을 바라보고 고민한 계획이어야겠습니다. 진정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나와 이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철학자 김진영에게 애도의 시간은 새로운 탄생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며 프루스트의 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썼던 글이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가벼이 장을 넘길 수 없습니다.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졌습니다. “존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마지막까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진영님이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들도 아껴 읽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자의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그저 바쁘게 새해라는 도화지를 채워가기 보다는 사랑과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걷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 제게 새해는 시작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깊이 파고들고 돌아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온전히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 비워내야 할 것들을 더 고민해야겠습니다. 나이 들고 보니 설날로 이어지는 이 유예의 시간이 형벌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제대로 삶의 순간을 누리고 계신가요? 마음을 드러내며 후회없이 사랑하고 계신가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끼고 마음 깊이 감탄하고 계신가요? 

마지막으로 김진영 님의 메모를 옮깁니다. 

“삶은 향연이다. 나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덧. 김진영님의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세바시 영상들입니다.

조금 특별한 아이와 뚜벅뚜벅 아름답게 인생길을 걷고 있는 아버지 홍성원님의 고백이 담긴 강연입니다. 


제대로, 깊이있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윤홍균님의 강연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담아 전하는 법으로 큰 반향을 얻었던 사랑꾼 최정일님의 강연입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눈뜰 때 우리는 매일 새해의 첫날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향연의 순간들을 온전히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바다에 유리병 편지를 띄우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듭니다. 


윤성아 세바시 작가의 큐레이션 

1. 관점을 바꾸면 더 나은 내일이 보입니다 https://sebasi.co.kr/journal/286

2. 마음이 춥다면, 손을 잡아보세요 https://sebasi.co.kr/journal/296

3. 웃음을 자아내는 스피치를 위한 다섯 가지 비결  https://sebasi.co.kr/journal/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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